영화 비트 中에서 (1997)
결혼한 한 이성친구의 집을 방문했다. 돌도 지내지 않은 한 아이가 잠을 자고 있었는데 얘길 하는 종종 그 친구가 아기 머리를 좌우로 돌려 누이길래 왜 그러는지 물었다. "아, 이렇게 해야 아기머리가 예뻐지거든. 한창 어릴 때엔 애들 뼈가 무르니까 이렇게 만져주는 거야." 내 머리가 양 옆으로 짱구인 이유는 우리 어머니가 어릴 적 나를 그냥 눕혔기 때문일까. 과학적인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어 뭐라 더 얘기하진 않았다. 그 날 저녁,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중, 고교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.
중학 시절, 나와 내 친구들은 단발령에 처해진 백성들처럼 복장검사를 할 적마다 학생주임과 작은 전쟁을 치러야 했다. 머리카락이 귀 밑을 내려서지 않아야 하고 앞머리는 눈썹을 가리지 않아야 했다. 정해진 복장에서 이탈해서도 안 되었다. 바지를 줄이거나 늘려도 안 되고 넥타이도 제대로 갖춰야만 했다. 저항하는 대부분의 친구들은 반항심이나 탈선 때문이 아니라 저들끼리 똑 닮은 모양이기 싫었던 탓이 컸다. 도대체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. 멋을 부리거나 다른 사람과 다른 것 자체가 교칙위반이라니. 학교에서 다양성은 존중하라고 가르치는데 왜 학생의 다양성은 존중하지 않았던 것인지. 치장하고 가꾸느라 학업에 충실하지 못할 거라는 것 그리고 학교에서는 좋은 옷을 살 수 없는 아이들과 비교가 되면 안 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. 스스로 조금씩 변화시키며 꾸미고 다니는 건 온전히 불량학생의 몫이었다. 아무튼 나도 그대로 있기 싫었다.
당시엔 가위춤을 추던 가수 유승준이 인기여서 학교에서도 유승준의 머리를 따라 삭발을 하는 친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. 규정상 위반은 아니어서 학생주임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. 옆 짱구 머리인데다 길게 뻗은 생머리였던 탓에 학교 규정대로 머릴 자르니 영락없는 버섯이었다. 어쩌면 지금에야 또 귀엽게 봐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땐 비디오가게에서 본 19세 관람불가였던 비트의 정우성처럼 머릴 아예 밀어버리자! 하지만 결심한 당일부터 삭발금지령이 내려지고 말았다. 불량서클 친구들이 곧잘 머릴 밀기 다니기 시작했던 탓이었다. 나는 별 다른 방법 없이 바보 같은 머리로 중학교를 졸업했다.
고등학교를 가서도 여전히 내 머리카락은 학교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. 그런데 그때 한 친구가 내게 초록색 젤리 같은 것을 가져왔다. 자, 이거 봐. 손에 이렇게 묻혀 머리카락을 세우는 거야. 헤어 젤이었다. 그 뒤로 내 방엔 늘 젤이 있었다. 하지만 젤을 바를 때마다 여간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. 손 끝에 끈적하게 묻어난 젤을 처리하기 위해선 비누칠을 여러 차례 해야만 했으니 말이다. 게다 왠지 모르게 그 특유의 인위적인 모양새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. 남들 하는 것 따르면서도 내심 뭔가 늘 불만이었고 다른 방법이 있을 것만 같았다. 어설프게 멋을 내려던 난 머리를 어찌 해 볼 수 없어 그만 아뿔싸, 내가 쓰던 안경을 푸른 색 렌즈로 교체해 버리고 말았다. -지난 날, 그 충격적인 졸업앨범은 지금 내게 없다. 가능하면 죄다 찾아 불태우고 싶다-
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용케 탈색까지 해선 회색머리를 시도했는데 일주일도 채 버티지 못했다. 정작 회색이 되자 나이 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버스 정류장이라던가 길을 가다 내게 핀잔을 주어 머쓱해지기도 했다. 그 뒤엔 왁스도 생겨 젤에서 왁스로 갈아탔다. 마치 486 컴퓨터에서 586 컴퓨터로 교체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. 펌이란 펌 종류는 죄다 시도해보고 염색이란 염색은 죄다 시도했다. 군에 가서는 한창 반삭머리였고 제대 후엔 몇 해 간 장발 머리를 했다. 사실 지금도 여전히 내 머리카락은 제 자릴 잡지 못했다. 내 머리카락을, 내 옆짱구 머리를, 나는 아직 어찌 해야 할 지 감이 오질 않는다.
Editor Pak Sunwoo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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